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1)
오월의 제주에서 1
...................
처음 제주에 온 것은 대학에 다닐 때였습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며칠을 남루하게
보내다 바람에 지쳐 거지가 되어 돌아간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 참으로 여러 번 제주에
왔습니다. 성산과 모슬포와 고산과 협재와 서귀포에 보름씩 혹은 한 달씩 머물며 섬 전체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얼 하며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려 삼십대 중반까지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처럼 아름다운 땅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곳은 아열대풍이고 비바리풍
이고 유채꽃 바람이고 온갖 귀양 온 꽃들의 마지막 서식지이며 또한 가여운 무덤입니다.
그러기에 바람 속엔 언제나 투명한 비애가 서려 있습니다. 현무암과 바다의 선명한 대비는
이 땅을 영원한 귀양지로 남겨둡니다. 나 역시 그때마다 귀양 오는 기분으로 짐을 꾸려
이곳으로 떠나온 것이었습니다.
중문에서 나흘을 보내며 이리저리 차를 끌고 다니다 우연히 성산포 신양해수욕장 근처의
유럽풍으로 지은 집을 발견한 건 엊그제입니다. 토착민들이 사는 마을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더욱 이채로워 보였습니다. 누가 사나 궁금하여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빨래를
너는 주인여자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안으로 나를 드리고는 커피를
끓여주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바당보름(바닷바람)’ 이라는 문패를 단 이 집에 묵고 있습니다. 이 집의 주인
은 사십대 중반의 부부입니다. 주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열여덟 살 때부터 무려 이십팔 년
동안 산업은행에 봉직하다 98년5월에 그만두고 이곳 성산에 내려와 대규모 역사를
벌입니다. 집짓기가 곧 그것입니다.
미리 얘기하면 뉴질랜드 풍으로 지은 이 집은 가히 예술품에 가깝습니다. 주인은 압구정
동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친구 건축가에게 우선 설계를 맡깁니다. 성산포와 가장 비슷한
날씨와 지형을 가진 뉴질랜드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설계 도면을 뉴질랜드 현지로 보내 건축 자재 전부를 선박 화물로 들여옵니다.
현지에서 마오리족 인부까지 한 명 사서 화물과 함께 불러들입니다.
포크레인으로 땅을 밀어낸 다음 이들 부부는 옆집에 세 들어 살며 사 개월 동안 인부 열다섯 명의
밥을 해대며 폭풍 속에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 다음 마을 사람들을 전부 불러 이틀 동안 잔치를 벌입니다.
이곳 주민으로 살아야 하므로 토착민들에게 신고 인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밥을 뜸들이듯이 소나무를 쪄내 지은 복층식 이 이층집은 얼핏 보기에는 얼핏 보기에는
목조 가건물 같지만 안팎이 모두 부드럽고 견고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등 하나 수도꼭지
하나 손잡이 하나가 모두 치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부는 분홍색 벽면과 하늘색
천장으로 돼 있고 파스텔톤의 쑥색 카펫을 깔아놓아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집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바람과 낭만의 미술관, 이라고 말입니다.
담장은 4톤 트럭 스물다섯 대 분량의 현무암으로 올리고 이백 평의 정원은 야자수와
잔디로 가꾸어 놓았습니다. 작년에 태풍이 부는 밤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집이 무너
지지 않았느냐고 걱정들을 했다고 합니다.
주인은 공사 과정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사진첩에 꼼꼼히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마을 사람들의 테니스 강습을 해주고 낮에는 주로 윈드서핑을 합니다. 동네사람들과
잘 어울려 찾아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시공에 살려면 인심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 남들보다 오 년 내지 십 년 빨리 정년 퇴직을 했다고 말합니다. IMF 때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아마도 모종의 상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퇴직을 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은
성산에 내려와 술만 마시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집짓기는 그의 전 생애를 밀어 넣는
대 역사였던 것입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큰아들은 군대에 가 있고 작은
아들은 제주대학교 기숙사에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그 아들의 방이 있는 이층을 빌려 쓰고 있습니다. 저녁 한 끼는 이들 부부와
식사를 합니다. 부인 또한 서글서글하고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삶을 서로 잘 견디고 지켜온 사람의 아름다운 결이 느껴집니다. 다음번엔 이 부인에게서
몰래 엿들은 집주인의 얘기를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