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가는 길
관광지에서 방황하지 말 것
-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 -
나는 지금 섭지코지를 걷고 있다. 부서지는 해변의 파도가 바위에 물보라를 만들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제주도 동해의 수평선에 어선 한 척이 떠 있다. 물이 참으로 맑고 파랗다.
파란 하늘과 파란 물이 맞닿아 수평선 분간이 애매할 정도다. 굳이 따진다면 물색이 더 짙고
하늘은 조금 연하다. 북쪽으로 성산일출봉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성산 읍내의 높고 낮은
건물들이 흡사 아드리아해의 고대 그리스 건축군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다. 그때 ‘통통배’가
여러 척 줄지어 성산포를 떠나 섭지코지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신양리마을에서 30여 분만 걸으면 족히 반도의 끝에 당도한다. 이른바 신양해수욕장이라
불리는 모래톱을 걷노라면 파란 바다와 하얀 모래, 길 옆의 풀밭이 어우러져 잔잔한 호숫가를
연상시킨다. 반도의 끝에 연기를 올리던 연대가 나타난다. 섭지코지 바깥쪽인 동해는 호숫가
같은 안쪽과는 판이하다. 한마디로 파도가 일렁이는 남성다운 바다.
나는 바다만 보면 으레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로 시작되는 동요를 부르고 싶다.
나는 그 동요를 몇 번이나 읊조리며 섭지코지를 걷고 또 걸었다. 양 옆으로 바다가 펼쳐진
자그마한 반도로 이루어진 섭지코지 해안길의 고즈넉함이란. 섭지코지 해변을 걷노라면
나의 잃어버린 시심 같은 그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몸을 달군다. 풍부한 바다 풍광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나그네의 마음은 ‘느낌의 바다’로 빠져든다. 섭지코지 가는 길은 아마도
제주 해변길을 걷는 최고의 여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경고하곤 한다.
관광지에서 공연한 미련 갖고 방황하지 말 것!
그대도 공항에 도착하거든, 번잡스런 관광지를 벗어나 그대로 섭지코지로 떠나라.
그리고 말없이 걸어라. 차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그런 멍청한 짓은 관두는 게 좋다.
아름다운 바닷길을 걷는 것도 우리 문화 기행이리니. 애써 문화유산을 찾지 말라.
제주도까지 와서 고급스런 문화유산을 찾는 기행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제주도의 문화는 그야말로 그네들의 생활사, 그네들의 민속에 모조리 담겨 있을지니.
제주 기행의 핵심을 섭지코지 같은 자연환경에 두고, 그네들의 고단한 일상에서 출발하고
마감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
* 이용호가 이 곳 신양리에 자리잡게 된 동기는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혀진 터...
아쉽게도 '자연보호구역' 이라 돌 하나 풀 한포기도 다치지 못하도록 단속하더니
우찌우찌 콘도가 들어서서 이제는 섭지코지의 그림같은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좌향좌' 하고서 일출봉 방향을 바라보며 걸으면 아쉬운대로 반분은 풀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