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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기행 (독후감)

테니스선생 2013. 7. 21. 10:19

우리 젊은 시절엔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 것이 꿈 이었다.

요즘처럼 여행정보를 쉽게 구할 수 없어서 공항에서 대절한 택시 기사가

하자는 대로 따라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용두암, 삼성혈, 목석원, 성산일출봉, 천지연폭포, 산굼부리, 만장굴, 조랑말

승마 등,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친구들의 집들이에 가보면 사진 찍은 장소와

포즈가 너무 똑 같아서 앨범의 인물만 바꾸어 놓은 것 같았다.

 

세상사에 쫓겨 살며 10년쯤 지난 어느 날, 부부가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자는

뜻에서 제주도를 다시 찾게 되었다.

그동안 관광지가 많이 개발되어 중문관광단지, 한림공원, 우도 등 새로운

구경을 하고나서, 택시기사가 “알려지지 멋있는 곳을 보여 주겠다” 면서

‘섭지코지’로 안내하였다.

 

한적한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신양해수욕장에서 오락가락하는 윈드써핑의

이색적인 풍광에 매료되어, 지나는 길에 복덕방을 찾아 들어가 해변 가까운

마을에 시골집을 한 채 구입하게 되었다.

 

그 후 제주도에 관련된 글을 유심히 보며 스크랩을 하다가,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이라는 에세이를 읽고 언젠가 은퇴하게 되면 아련한 마음의

고향 ‘그리운 바다 성산포’ 그리고 성산일출봉이 마주보이는 섭지코지로

이주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나는 바다만 보면 으레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로 시작되는 동요를 부르고 싶다.

 

 

 

 

나는 그 동요를 몇 번이나 읊조리며 섭지코지를 걷고 또 걸었다. 양 옆으로 바다가 펼쳐진

 

 

 

 

자그마한 반도로 이루어진 섭지코지 해안길의 고즈넉함이란. 섭지코지 해변을 걷노라면

 

 

 

 

나의 잃어버린 시심 같은 그 무언가가 울컥 올라와 몸을 달군다. 풍부한 바다 풍광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나그네의 마음은 ‘느낌의 바다’로 빠져든다. 섭지코지 가는 길은 아마도

 

 

 

 

제주 해변길을 걷는 최고의 여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경고하곤 한다.

 

 

 

 

 

 

 

관광지에서 공연한 미련 갖고 방황하지 말 것!

 

 

 

 

 

 

 

그대도 공항에 도착하거든, 번잡스런 관광지를 벗어나 그대로 섭지코지로 떠나라.

 

 

 

 

그리고 말없이 걸어라. 차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그런 멍청한 짓은 관두는 게 좋다.

 

 

 

 

아름다운 바닷길을 걷는 것도 우리 문화 기행이리니. 애써 문화유산을 찾지 말라.

 

 

 

 

제주도까지 와서 고급스런 문화유산을 찾는 기행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IMF 때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성산읍 신양리로 이주해서 그림 같은

집도 짓고 윈드써핑도 하고 온 섬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제주도

박사(?)가 되겠다고 귀동냥 눈동냥을 하고 다녔다.

 

세밀한 제주도 지도와 관광가이드 책자 수집은 물론 인터넷의 여행 정보

카페 가입과 입소문을 통하여 멋있는 볼거리와 맛있는 먹거리를 발품을

팔며 직접 찾아가 확인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도서관에서 제주도 설화를 비롯한 각종 출판물도 꼼꼼하게 챙겨보고,

어설픈 제주도말로 아는 척을 하며 여행객을 헷갈리게 하기도 했다.

 

성산일출도서관에 진열된 ‘서귀포시민의책 선정도서’를 훑어보다가

‘제주기행’이라는 책 제목보다 저자 이름 ‘주강현’이 더 눈길을 끌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빌리긴 했는데, 책 제목으로 보아 여행안내 책자나 기행문

같기도 한 것이 백과사전처럼 두꺼워서 조금 부담이 되었다.

 

일단 책을 펼쳐들고 쭈욱 목차와 함께 수많은 사진들을 살펴보고 평소에

접하던 테마로 생각하였으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저자의 학문적인 탐구와

제주도의 생활경험에서 우러난 해박함에 놀라 머리칼이 쭈뼛 서고 온 몸에

소름이 돋치는 기분을 느끼며 한숨에 다 읽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제주도는 섬이다.

행정적으로 격상되어 島가 道가 되었지만, 폭풍이라도 불어 교통편이 끊기면

누구나 비로소 제주도가 섬임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제주도를 ‘테마파크’라고 하면서,

15개 테마 : 바람 · 돌 · 여자 · 잠녀 · 귤 · 곶자왈 · 테우리 · 화산 · 삼촌

· 우영팟 · 神들 · 표류 · 해금과 유배 · 탐라와 몽골 · 장두에 다가 각각

‘~의 섬’이라고 목차를 붙이고 ‘섬’을 강조하였다.

 

1. 바람의 섬

저자는 “바람, 그 혹독하고도 일상적이며 특별하고도 평범한 바람을

마다하고서는 제주도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으리라.”라고 전제하면서

바람 때문에 생기는 역기능보다 오히려 순기능 즉 장점을 강조하였다.

제주의 바람은 온갖 문물을 실어오는 문명의 네트워크 역할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바람의 미학으로 폭낭의 모양새, 바람을 화폭에 담은 변시지 화백의

그림, 띠로 얽어매어 둥글게 엮은 초가지붕 등을 예로 들고 있다.

 

2. 돌의 섬

제주도 사람들은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돌 구들 위에서 태어나고 죽어서는 산담에 둘러싸인 작지왓(자갈잩)의 묘

속에 묻힌다. 돌담의 미학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절반은

이해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돌을 다루는 사람, 돌챙이의 손과 도구가 가미되면 볼품없는 돌멩이라도

예술품으로 바뀐다. 제주민의 표정을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돌 문화의 으뜸으로 돌하르방보다 동자석을 꼽고 있다.

 

3. 여자의 섬

최부의 <표해록>은 제주도에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이유를 잘 설명한다.

제주도 남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많이 죽어서 “부모 된 자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아이가 내게 효도를 잘할 아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라고 말합니다.“

남자의 숫자가 여자보다 절대적으로 적다보니 제주 사회에 축첩제도가

일반화 되었고, 수탈을 피해 육지로 떠난 포작인들, 해난 사고로 죽은

남자들의 몫까지 고통스러운 노동을 떠안게 됨으로서 제주 여성은 생활력이

강하다고 한다.

 

4. 잠녀의 섬

“해녀 하나가 사라지면 제주도의 박물관이 사라지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을 곰씹어 보면 해녀가 제주도의 상징으로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외국인에게 관광가이드를 하면 해녀가 물질하는

장면을 가장 보고 싶어 한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도 있다.

해녀의 물질이 높은 소득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험한 노동에 비하여

월등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5. 귤의 섬

귤은 예쁘고 맛있는 과일로만 여겼는데, 예전에는 원한의 과일이 열리는

고통나무였던 시대가 있었고, 나중에는 제주도민의 주 소득원으로서

대학나무로 대표적인 환금작물이 된다.

탐라에서는 백제나 신라에 감귤을 공물로 바쳐왔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졌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민가에서 재배하는

감귤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관리들이 찾아가 열매 하나하나에 꼬리표를

달고는 하나라도 없어지면 엄하게 처벌했다고 하니 원한의 과일이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6. 곶자왈의 섬

곶자왈은 ‘덩굴과 암석이 뒤섞인 어수선한 숲’을 가리키는 제주 방언으로

가시덤불과 나무들이 혼재한 ‘곶’과 토심이 얕은 황무지인 ‘자왈’이 결합된

단어이다.

저자는 곶자왈이 제주도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임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편이다. 숲 때문만은 아니다. 화산섬 특성상 지하수가 렌즈

모양으로 고여 있다고 하는 ‘렌즈 효과’ 때문이다.

곶자왈 지표면 아래에는 살아 있는 물이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다.

식물은 그 물을 일용할 식수로 사용하면서 인간에게도 선사하는 중이다.

담수를 적정 수준 이상으로 뽑아 쓰게 되면 렌즈는 굴절되고 바닷물이

치고 들어와 지층은 염수를 채워진다는 주장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7. 테우리의 섬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마소를 키우는 전문적인 목축 기술자를 ‘테우리’라고

한다. 목축은 대체로 몽골 지배기에 본격적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고

하는데, 제주도가 맹수 없는 초원인 데다가 격리된 섬이라 가축이 도망치지

못하니 이만한 목장 터가 아시아에 또 있을까 여겨진다.

제주마의 명칭은 탐라마, 제마, 토마, 국마, 조랑말 등 다양하다.

조랑말은 체구가 작은 말을 가리키며, 고서에는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갈 수 있는 말’이라는 뜻으로 과하마(果下馬)로 기록되어 있다.

 

8. 화산의 섬

서양인 최초로 한라산을 등정한 이는 1901년의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이다.

그가 서술한 놀라움의 한 대목.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인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섬을 지나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였다.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 이해의 첩경은 당연히 오름이다.

오름은 두말할 것 없이 ‘오르다’에서 왔다.

일찍이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은 <남환박물>에 이렇게 썼다.

“한라산은 한가운데가 우뚝 솟아 있고 여러 오름들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의 이슬 구슬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연잎 위의 이슬 구슬’. 이렇게 탁월한 표현이 또 있을까.

 

9. 삼춘의 섬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쉽게 부르지 못하는 호칭이다.

저자는 분명히 제주도 토박이들의 발음대로 ‘삼춘’이라고 썼는데, 교정에서

‘삼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까운 남자 친척인 삼촌(三寸)이 아니라, 제주도에서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나이 드신 이웃 어른을 공경하는 의미로 ‘삼춘’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 삼춘 호칭은 모두가 ‘궨당’이라는 공동체의식에서 나왔다.

궨당은 한문으로는 권당(眷黨),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말이다.

척박하고 가난한 살림에 서로 돕고 살아가는 ‘궨당’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공동체였다.

 

10. 우영팟의 섬

오늘날에도 제주도에는 건강한 노인이 많다. 팔순 넘은 할망 해녀가 물에

뛰어드는 경우도 많다. 장수의 비결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에 있다지만

또한 우영팟(텃밭)에서 나온다고 한다.

따스한 기후도 무시할 수 없다. 겨울과 초봄에는 모진 바람이 불어 육지

이상으로 춥지만 실제 기온은 따스하다. 2월 추위에도 상추가 야외에서

월동하기 때문에 농약 치는 상추와 비교할 수가 없다.

게으르지만 않다면 우영팟 소출만으로 5인 가족이 먹을 채소를 충당할 수

있으므로 우영팟의 힘은 제주 음식의 본질적 원동력이다.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란 속담도 바뀔 때가 되었다.

말만 보낼 것이 아니라 사람도 제주특별자치도로 보낼 일!

 

11. 신들의 섬

조선 효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은 <탐라지>에 이렇게 썼다.

“풍속은 음사를 숭상하여 산과 숲, 내와 못, 높은 언덕이나 낮은 언덕,

물가와 평지, 나무와 돌 따위를 모두 신으로 섬겨 제사를 베푼다.”

유교 지식인의 눈에 비친 제주도는 흑신이 무지몽매한 백성을 지배하는

미신의 섬이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제주도를 ‘신들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제주도는 1만8천 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에게 해에 올림포스 산이 있어 만신의 계보가 창조되었다면, 제주도에는

‘송당’이 있어 본향당이 퍼져나갔다. 신의 계보는 일가붙이의 잔가지만큼이나

섬 전체로 뿌리내렸다.

제주도 어느 마을이고 존재하는 본향당은 그리스로 치자면 마을마다 신전이

하나씩 서 있는 식이다.

 

12. 표류의 섬

표류는 인간의 항해기술력 조건과 자연적 조건이 불합리하게 만나서

이루어지게 되는 우연과 필연의 산물이다. 표류는 우연이지만 필연이고

필연이지만 우연이기도 하다.

배 없이는 내왕이 불가능한 제주도에서는 표류 사건도 잦았다.

추자도와 제주도 사이에는 배를 댈 만한 곳이 없어 강풍이 불면 표류가

가장 빈번했다.

우리의 가장 흥미진진한 표류기는 대체로 제주도를 거점으로 탄생하였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표류기도 살아남은 자의 기록일

뿐이다. 확률상으로 표류자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육지와 제주도 사이를 왕래하다가 태풍을 만나서 대만 ·

중국 · 류큐 · 일본 · 필리핀 등지로 표류하였다고 한다.

표류의 국제성은 서양인 선박의 출현으로 더 세계화된다.

1627년에 네덜란드 선원 얀 야네스 벨테브레가 제주에 표류하였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훗날 한국인 부인을 얻고 정착한 ‘박연’이, 1653년 역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 해안으로 표류하였을 때, 그는 노인의 몸으로

통역에 나섰는데 우연과 필연이 이같이 교호하니 역사란 참으로 오묘하다.

 

13. 해금(海禁)과 유배(流配)의 섬

고대 및 중세의 제주는 대단한 해양력을 자랑하였다.

해금 정책은 1629년부터 1823년까지 무려 200여 년간 계속되었다.

섬에 유폐된 제주 사람들은 우마나 사육하고 공물을 진상하는 과중한

부담과 부역에 시달릴 뿐 바다로 나가는 원대한 삶은 제대로 꿈꿔보지도

못하였다. 섬 자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하였다.

항해력과 조선술이 급격히 쇠락하는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걸핏하면 배가 표류하고 난파당하여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제주도가 머나먼 변경으로 치부된 데는 이 같은 배경도 한몫했다.

선조의 손자이며, 두형과 함께 15세의 나이로 제주에 유배되었던 이건은

<제주풍토기>에서 제주도 귀양살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속반(粟飯:조밥)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갈(蛇蝎:뱀류의

총칭)이다.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이다. 하물며 왕도의 소식, 고향의

소식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몽혼(夢魂)에나 물어볼 수밖에, 들을 길이 없다.

병이 들면 그저 손을 놓고 죽음을 기다릴 뿐으로 침과 약을 쓸 방법이 없다.

이야말로 통국(通國)의 죄지(罪地)이다. 나라에서 죄인을 이 땅으로 내쫓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탐라는 통국의 죄지로서, 유찬(流竄)은 나라의

중형이다.”

* 통국 : 온 나라 전체

유찬 : 죄인을 귀양 보내는 일

 

14. 탐라와 몽골의 섬

제주도는 본디 탐라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제주란 호칭은 탐라 멸망 이후의 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16년(1229)에 제주가 등장한다. 탐라가 제주로 바뀌어 일개 ‘洲’로

전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별초 정벌 이후에 원의 직할지가 되면서

제주라는 명칭 대신에 탐라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한다. 원이 제주도와

고려의 관계를 차단시키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이후 충렬왕

20년(1294)에 탐라가 고려에 반환되면서 다시 제주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섬사람의 뜻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5. 장두의 섬

제주민의 역사적 DNA 안에는 중앙의 몰염치에 가까운 수탈을 저어하는

그 무엇인가가 숨어 있지 않을까. 그 본능적 저항은 ‘육짓것’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

본토에 속박당하고 당해온 슬픈 과거 덕분에 제주 사람들은 ‘육짓것’이란

말을 은연중에 쓴다. ‘육짓것’, 대단히 배타적인 단어다. ‘육짓것’과 ‘육지

사람’은 어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주민으로서는 ‘육짓것’이라는 말이 듣기에 상당히 거북하고 기분 나뿐

비속어임이 틀림없으나, 제주도가 더욱 개방화되면서 ‘육짓것’이라는 언어와

혐오증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장두의 표본으로 이재수를 설명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다.

필자가 제주도로 이주하기 전에는 이긴자의 기록물인 역사책에서 기록한

대로 관군에 저항하는 반군 장두 이재수의 난으로,

공산당원과 그 협력자들이 일으킨 지리산의 빨치산과 같은 시각으로

제주4·3사건을 피상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제주도 성산포에 이주해서 15년을 살면서 진실을 알게 되었고

제주민의 정서를 이해하게 되었다.

제노사이드는 집단살해 또는 단체적 살해를 의미하며, 특정 민족 · 집단을

절멸할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생활조건을 박탈하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그런 행위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다.

 

* 에필로그

 

필자가 ‘제주기행’을 읽고나서 제주대학교 석좌교수이신 저자를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던 차에, 지난 6월21일 서귀포기적의도서관

에서 주강현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마침 강연 주제가 제주를 바라보는 경계인의 시선 (‘제주기행’ 저술의 이유와

그 의미망)이었는데, 이미 그 책을 세밀하게 읽었던 터라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저자와 필자가 경계인(?)으로서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

경계인이라 함은 30여 년 전부터 제주도와 맺어온 갖가지 인연과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제주도로 이주해서 십수 년을 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토박이가 볼 때는 ‘육짓것’ 좋은 말로 ‘육지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을

‘경계인’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싶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은 주변을 편안하게 느끼고

자기 땅이라 생각하는 토착민보다 이방인이(고통은 더 따르겠지만) 더욱

면밀히 탐색하면서 적응하는 기술을 배운다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이방인은 자신이 들어가는 사회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15개 테마를 중심으로 서술한 ‘제주기행’은 저자가 평생 몸으로

체험한 경험을 학술적으로 기록한 제주도 인문학사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는 제주도민들은 행간에 스며있는 진솔한 충고를 헤아려 주시고,

제주도 방문객들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을 되새기며 읽어보기를

권한다.

 

필자가 15년전 제주도 동쪽 끝 바닷가 어촌마을 신양리로 이주할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말.., ‘육짓것’들은 정들만하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진다며 나를 백안시했다.

넓은 땅 사서 큰집 짓고, 아들을 제주대학교에 보내고, 지역주민에게

테니스를 지도하며 친교를 맺어도 아직까지 이방인 즉 경계인으로 자타가

간주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당 저 당보다 궨당’이 중요한 제주도 사회에서 제주 토박이와

사돈이라도 맺어야 제주인이 될 수 있을라나..?! ^^

 

* 경계인 : [심리] 바탕이 서로 다른 문화나 사회, 집단의 경계선상에 있고,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 여러 집단에 대해 귀속감을 가지고 있어 동요하기 쉽다든지,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고 소외감과 고독감을 가지기 쉬운 경향을 나타낸다. 소속 집단을 옮겼을 때, 새로운 집단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할 때 흔히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