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놀고 하루 쉬며 무위도식하는 해가 거듭될수록 부인님의 기척을 살피며
무언가 칭찬받을 일거리를 찾게 된다.
백수생활 12년차.., 그래도 등따시게 그리고 삼시세끼 항상 따땃한 밥상 차려
주는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티브이를 보다보니 어느 절의 큰 스님이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하신다는데
중생들이 ‘시님이 어찌 이런 일 까정..?!’하며 관심 겸 인사를 드리자..,
‘다 수행이야 수행’이라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리신다.
이 아저씨도 잔디밭에 검질 매기, 음식 찌꺼기 마당 구석에 묻기, 쓰레기통
비우기, 카펫 청소기 돌리기 등을,
위 시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착실히 하다가.., ‘설거지하기’를 추가하고는
내심 마누라의 환심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설거지는 하고잡아서 하는게 아니라 저녁식사 시간에 반주를 곁들이고
싶긴한데 ‘오늘도 쇠주냐’는 힐책을 피하기 위해 아내가 식탁을 떠난 후에
살짝 기울이고 나서 증거 인멸을 위한 뒷정리였다고나 할까..?
매일 아침 6시 코트에 나가 초저녁에 자는데, 그날은 5시쯤 눈이 떠져
주방에 갔더니 찜 솥에 육괴기 국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솥 가장자리에 굳은 기름도 엉겨있어 ‘올치! 이거야말로 깨끗이 닦아놓으면
지대로 칭찬받겠거니..!’하고 국물을 싱크대에 버리고 반짝반짝 윤을 내놓고
테니스장에 와있었더니, 집사람이 엉엉 울면서 달려온 것이 아닌가?
육개장 끊일려고 모처럼 한우 사다가 폭 다려 놓은 국물을 버렸냐 면서.....?
아뿔사!! 시키지 않은 짓하고 몇 며칠째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비실대다가
간신히 사태가 수습될만한데.., 엊그제 “우리말겨루기”를 함께 보다가
‘꽃물’이라는 문제의 답을 보자마자 부인님의 분노가 다시 폭발!!!
<씨피엑스>
* 꽃물 : 곰국, 설렁탕 따위의 고기를 삶아내고 아직 맹물을 타지 아니한
진한 국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