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김영춘의원 블로그
정난주 마리아와 조선왕조
몇해 전 여름 나는 가족과 함께 제주도 대정읍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차창 밖으로 조그마한 안내표지판 하나가 내 눈길을 끌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차를 돌려 그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의 묘지를 찾아갔다. 알고 보니 그는 신유박해후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유명한 그 황사영의 처이고 다산 정약용의 조카딸로서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제주목 관노로 37년을 살다가 1838년 사망한 사람이었다.
관리인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단장해 놓은 이 묘지에서 제주의 저녁 어스름을 보내며 5살짜리 아들은 숨바꼭질 등으로 천진하게 놀기 바빴고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괜히 어슬렁거렸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묘지 안내문에 나와 있는 정난주의 아들 이야기였다. 대역죄인 황사영은 물론 능지처참으로 사형당했고, 그 어머니는 거제도, 처인 정난주는 제주도 관노로 만들어 유배한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2살배기 아들까지 추자도(북제주군의 섬이다)로 유배시킨 것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정난주는 제주도 유배길에 2살난 아들을 안고 배를 탔으며 도중에 추자도에 들러 아들을 내려 놓아야 했다. 그 때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삼족을 멸할 대역죄인의 자식이니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했을까? 결국 그녀는 죽을 때까지 바다사이 지척의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 어부의 손에 거두어져 역시 어부로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다. 나는 역사를 배우고 난 후 19세기의 조선왕조가 어떻게 멸망하지 않고 연명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궁금했었다. 중국의 왕조도 200년 아니면 3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역성혁명에 의해 다른 왕조로 바뀌었는데 어떻게, 아니 왜 조선은 500여년을 버티다가 외적에게 나라를 뺏기는 치욕의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19세기의 100년은 차마 나라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린 시대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고 국력과 정기가 쇠잔한 상태에서 200년을 버텼으면 됐지, 왜 100년을 더 지탱해 새로운 기운의 흥기와 자주적 근대화의 길까지 막아버렸을까? 나는 정난주와 그 아들의 유배 사건을 목도하며 그 비밀의 한 자락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군사부 일체, 반상(班常)의 계급분리 등 유교이데올로기는 체제이념이면서 또 한편 국가종교였다. 신정(神政) 일체의 체제라고나 할까? 기독교의 전파에 대해 그토록 과민하게 탄압한 이유도 바로 체제 유지의 근본 원리를 부정당하는 위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불행으로 연결되기는 했지만 체제 유지 능력 면에서 조선조는 분명 성공한 왕조였다. 심지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의 폭발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조차-그 역사적 의미 평가와 무관하게- 너무 늦게 일어났고, 그나마 왕조타도의 기치를 내세우지도 못했다. 오늘 새삼 조선 말기를 회고하는 이유는 망국의 식민지 세월까지 통한의 100년을 보내고도 우리는 여전히 조선조의 병폐들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특히 나라를 위해 깨인 시대정신으로 헌신하는 유능한 지도층, 수범의 대상이 되는 도덕적 상류계층의 부재는 여전히 조선조와 그 연장선에서 일제시대의 유산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화두이다. 8.15를 크게 자축하기보다는 8. 29 경술국치일을 곱씹어 반성하는 것이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첩경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지켜보며 8. 29를 조기를 내거는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법안을 내야겠다 마음먹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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